<權泰鳴의 간추린 日本歷史>
제9화 싸움으로 지샌 戰國時代
‘戰國時代’라는 용어는 고대중국의 ‘春秋戰國時代’에 따온 것이다. 무로마치막부시대의 정치서적인 ‘초담치요(樵談治要)’나
에도막부 때의 ‘日本外史’ 등의
고서에 ‘戰國’이라는 단어가 실려있지만 그 출현빈도가 아주 적다. 일본사의
시대구분에 ‘戰國時代’가 넓게 사용된 것은 明治時代부터이다. 무로마치막부의
권위가 추락하는 중기에 접어들면서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자 신흥지주와 상인부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등 사회적 힘의 균형이 크게 흔들리게
됐다. 새로운 권력계급으로 부상한 신흥실력집단이 오히려 영주를 밀어내고 위에 올라서는 이른바 하극상이
빈발하고 다양한 경력과 출신이 분명치 않은 ‘전국영주(戰國領主)’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北条早雲)
사회권력구조의
이 같은 변동에 따라 오닌전쟁이 종결된 1477년부터 무로마치막부의 장원조직은 사실상 붕괴되고
잇키세력과 슈고다이묘 간의 충돌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런 지배층과 백성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실력자로 급부상한 호죠소운(北条早雲)이
1493년 무력으로 현 시즈오카현 이즈(伊豆)반도를
점령함으로써 일본은 본격적인 전국시대로 진입했다. 이 시기는 아직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태어나기 41-49년 전이었다.
(織田信長)
(豊臣秀吉)
(德川家康)
슈고다이묘
보다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한 전국영주는 그 출신이 다양하다.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이마카와 요시모토(今川義元),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등이 슈고다이묘였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는 슈고대행, 그리고
호죠소운(北条早雲)과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는
지방유력무사인 고쿠진(國人) 출신들이다. 칼에
묻은 피가 마르지 않을 정도로 잦고 치열했던 전국시대의 전쟁을 마감시킨 걸출한 지략의 무사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이다. 1573년이다.
전국시대의
시작과 종결에 관해선 역사학자들 간에 의견이 달라 아직 정설이 없다. 시작연도가 오닌전쟁 후 무로마치막부체제가
통치력을 상실한 1490년이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모아지나 종결시점은 호죠 소운이 伊豆를 무력으로 점령한 1493년, 오다
노무나가가 무로마치막부를 폐문시킨 1573년, 노부나가가 아쓰지성(安土城)을
세우고 사실상 전국을 제압한 1576년,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권력을 장악한 1590년 등 다양하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75개의
크고 작은 나라의 영주들이 80년에서 100년 동안 合從連衡을 거듭하면서 생존투쟁을
벌인 치열한 전쟁으로 지샌 기간이었다.
전국시대의
막을 연 호죠 소운은 본래 무로마치막부의 명문인 이세(伊勢)가문
출신이라는 說과 일개 떠돌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이처럼 출신이 확실치 않은 영주가
적지 않았다. 오닌전쟁이 한창이던 때 스루가(駿河, 現시즈오카県)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義忠) 식객
노릇을 하다 당시로는 평균수명을 훌쩍 넘어선 50세 들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호죠
소운은 1493년엔 이즈(伊豆, 現가나가와県)국을
침공, 영주인 무로마치막부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敎)의
손자인 아시카가 차차마루(足利茶茶丸)를 추방하고 이어 사가미국(相模國, 가나가와県)의
오다와라성(小田原城)까지 빼앗아 1495년
이 성을 본거지로 삼아 남부관동지방의 강력한 지배자로 올라섰다.
(小田原城)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관동제일의 오다와라성도 뒷날 호죠 소운의 증손자인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아 파괴됐으며 결국 나라도 멸망하고 말았다. 우지마사의 아버지인 우지야스(氏康)는
아들이 밥을 먹을 때 밥그릇에 국물을 몇 번이고 부으며 먹는 것을 보고 “한 공기의 밥에 어느 정도의 국물이 필요한가를 미리 계산할 줄도 몰라서야 어떻게 한 나라를 탈취할 수 있겠는가” 고
아들의 기량부족을 탄식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전국시대의 막을 연 호죠 소운은 당시 도읍이
위치한 기나이지방에 대해 동쪽의 관동지방에서 전국시대의 첫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무사는 개돼지로 불려도 전쟁에서 이기는 자 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이 전국시대의 금언이었다. 정의는 언제나 승자 편에만 주어지는 시대였다. 전국시대의
전쟁에는 일반적인 전쟁규칙이 적용돼지 않았다. 어떠한 대의명분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필요하다
싶으면 터무니 없는 구실을 붙여서라도 빼앗아야만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당시 싸움의 이 같은 특성은 ‘권력은 오로지 토지에서 비롯된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넓은 땅이라야 인력과 재력이 보장되고 인력과
재력이 강력한 군대보유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었다. 武士道 따위는 아예 신경 쓸 덕목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배신과 하극상도 전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시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은 고대부터 국가권력구조가 황실과 정치담당으로 분리된 2원 조직으로 돼있다. 드물게
있었던 천황의 정치권력 행사는 성공한 적이 거의 없었다. 황실은 대개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로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11세기까지는 귀족이 정치의 주역이었고 그 후19세기
후반까지는 무사정치가 이어졌다. 무로마치막부가 일개 영주수준으로 약화되면서 수 많은 대소국가가 난립했던 전국시대는 最强者가
없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 오다 노부나가가 강자로 부상, 군소
국가를 차례로 정복하고 1573년 무로마치막부의 명줄을 끊은 후 완전한 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
1575년 조정으로부터 우대신(右大臣)에
임명되면서 다른 영주들을 지배할 근거를 확보했고 뒤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 現총리)에
올랐으며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자리에
오르자 전국시대의 긴 싸움이 막을 내렸다. 이 때도 영주들은 독립된 나라를 그대로 유지했다.
쇼군과
일반 영주와의 관계는 지금의 총리와 현지사(県知事)간의
관계 보다 더 큰 차이가 있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 와 이에야스 등이 전국의 영주를 통솔할 수 있었던 근거는 조정으로부터
받은 관직에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 누구도 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치유신까지 일본은 수많은 ‘都市國家’가
난립해 있었다. 세키가하라(關ケ原)전쟁
후 에도막부시대엔 공을 세운 수많은 무사들에게 땅을 領地로 쪼개줬기 때문에 이러한 독립국가가 300여
개에 이르렀다.
(西軍의 石田三成)
일본의
전국시대 초기가 우리나라는 朝鮮王朝 10대 燕山君時代이다. 1494년 12월
王位에 오른 연산군은 처음 4년간은 나라의 부패를 척결하고 학문풍토를 쇄신하며
후대 왕들의 제왕수업을 위한 國朝寶鑑을 편찬하는 등 선정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498년
史草문제로 士林派가 대거 숙청당하는 戊午士禍(또는 戊午史禍)가
일어났고 1504년엔 生母 尹氏의 폐비문제를 알게 돼 할머니인 仁粹大妃를 비롯하여 尹氏 폐비에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 수많은 사람이 잔인하게 희생된 甲子士禍가 터졌다. 그리고 계속된 인륜을 벗어난 폭정으로 2년
뒤인 1506년 9월 연산군은 폐위됐다. 中宗反正이다. 다시
2년 후인 1506년 11월
疫疾에 걸려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사망했다.
用語說明
戰國領主(戰國大名): 전국시대 각지에 할거한 분권적인 작은 봉건국가를
세운 영주. 슈고대리나 지방토착토호가 하극상을 일으켜 主君을 밀어내고 영주가 된 경우가 많았음. 가마쿠라나
무로마치막부 시대의 슈고다이묘(守護大名)는 막부가 파견한 지방행정책임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戰國領主는 독자적 가신단(家臣團)을 두고 영지를 독립된 나라로 만들어 지배했음. 최초의
전국영주는 이즈국을 세운 호죠 소운 임.
國人(고쿠진): 10세기 헤이안(平安)시대
중기 왕조국가체제 때 장원과 皇室公領)을 관리한 관원. 막부시대엔 독자의 세력을 가진 지방토호 또는
소 영주.
右大臣: 7세기부터 시작된 관직. 조정의
최고기관인 太政官職의 하나로 태정대신, 좌대신에 이은 3번째의 고위직. 3직위를
합해 三公이라 함.
関ヶ原의戦鬪: 도요토미 사후 그의 참모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軍(西軍) 과
도쿠가와 이에야스軍(東軍)이
1600년 9월 15일
지금의 기후현 세키가하라(関ヶ原) 벌판에서 벌인
전투. 이 싸움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1603년 현 도쿄인 에도(江戶)에
막부를 개설하고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로 군림함.
[끝]
權
泰 鳴
Email from Inshik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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