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21, 2014

월남 여행기 (Vietnam Travel Diary)

724, 2014 Thursday.  36 C. 97F, clear  , 하노이

어제 늦게 이곳 하노이에 도착해서 몸이 피곤했지만, 우리는 아침 일찌기 일어나 호텔(Melina Hotel)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했다. 훌륭한 부페 조식이였다. 대부분이 서구식이였고 월남식 음식종류가 약간 섞여 있었다.

8
시에 호텔 로비에서 함께온 일행이 모두 만났다.   뻐스는 우리를 싣고, 호치민시체가 있는 mausoleum 위치한 바딘광장 부근에 도착했다. 넓은 광장에는 벌써 묘소를  방문하려는 수천명의 월남국민이 뜨거운 햇빛을 마다하고 줄을 서서 세시간씩 기다리며 입장을 기다리는것을 보았다. 가이드로 부터 Mausoleum 호치민에 대한 설명을 들은 다음, 우리는 가까운 부근에 자리 잡은 호치민 박물관, 호치민 사무실 (프랑스 총독부였음), 신사무실, 서기 1040년에 지웠다는 연못안의 조그만 사원, 소수민족 박물관등을 두루 둘러 보았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가는곳 마다 여행자들로 만원이었다.

호치민 사무실에는 호치민이 갖고있던 여러책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라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국민 모두 평등하게 살자는 호치민의 민족주의적 정치철학이 맑스 레닌과 정약용의 영향을 받은것이라고 부친다. 호지민은 자기가 죽은후에 자기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나무 한그루씩을  심어 달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서  전쟁으로 벌거버숭이가 되었던 산과 벌판을 오늘의 울창한 숲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그가 어쩐지 김구선생과 비슷한 민족 주의자처럼 느껴졌다월남은 지금도 사회공산주의 국가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시민권 여행자는 아직도 월남비자가 있어야 입국할수 있다. 한국 시민권자는 무비자국으로 되어 있어 비자가 필요없었다. 월남은 후진국에서 흔히 볼수있는 경찰 우선과 횡포가 아직도 상당하다그리고 얼마나 과장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섯 사람중에서 한사람은 철저한 공산당원이며 일체의 정부 비판은 상부로 보고가 된다고 가이드가 강조한다. 그리고 소수민족 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박물관 진열품은 빈곤 하였다.

월남은 대다수(87%) (Kinh)민족이며, 나머지는  53개의 소수민족이 섞어서 형성된 국가이다.

1890
년에 태어난 호치민은 젊은 시절을 불란서, 미국, 중국 그리고 러시아에서 식당일과 청소등 하층노동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고 이때부터 어렵게 살고 있는 월남국민생활과 외국침략으로 잃은 월남국가의 독립을 워하여 평생을 보낼 신념을 길렀다그는 불란서, 러시아, 중국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 월남 공산당을 창당하였고감옥에도 몇년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1945 월남이 독립되자, 수상이 되었고(1945-1955) , 계속해서1969까지 북부월남의 대통령이였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월남전쟁이후, 동안 남부 월남국의 수도였던 사이공도 그를 기념하여 지금은 호치민시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제 월남의 수도는 북부에 있는 하노이다.

월남은 세기에서는 찾아 보기 드물게도 오랜 기간동안 외부나라의 침략과 전쟁으로 국토가 파괴되고 국민들이 말할수 없는 고생을 나라다.

1884
년에 불란서군의 침략으로 군점령시대가 시작되었고  1941년에 일본군이 침략하여 월남을 잠시 통치 하였다.

 1945
  2차대전을 통하여 불란서와 일본으로부터 독립되었다. 그러나 1945  소련, 중국을 포함한 공산국가들이 북부 월남을 지배하자, 불란서는 계속 월남을 다시 점령하고자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소위 1 인도 차이나 전쟁이였고, 1954 전쟁이 끝날때까지 월남은 10년동안 다시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1 인도 차이나 전쟁이 끝나자, 월남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17도선을 중심으로   한국처럼, 다시 남북으로 분리되어, 북부월남은 공산국가가 되었고, 남부월남은 민주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북부월남국은 남부지역에있는 민주주의 월남공화국을 소위 비에트콩을 통하여 계속 게릴라전으로 공격하였다그러다가  1964 통킨만 사건과 Domino Theory 의거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소위 민주주의 연합국이  남부 월남국과 연합하여 북부 공산월남을 상대하여 대규모의 전쟁을 하니, 이것이 2 인도 차이나 전쟁(소위 월남전) 였고, 전쟁은  1975 4월까지 10 여년을 전쟁으로 계속되었다월남은 그러니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후반까지 90여년을 쉴새 없이 전쟁때문에 국가가 파괴되고 국민이 고생한 나라라고 할수있겠다. 2 인도 차이나 전쟁중에 사용한 폭탄이 2 세계대전중 사용된것 보다도 많았다니 받은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수 있을것만 같았다.

북부 월남 국민은 불란서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예로, 호치민 대통령의 100 생일을 기념해서 세운 호치민 박물관 한곳에는 불란서를 뜻하는 에펠탑 모형 옆에 자전거를 꺼꾸로(붕괴 혹은 반대의 뜻으로) 전시하여 놓았는데, 목적은 불란서 감정을 비유해서 보여주기 위한것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월남전쟁중에 용맹스러운 한국군에게 피해도 많이 보았는데, 한국과 미국에 대하여는 상당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가 하면, 중국과 중국 국민들은 환영을 받지 않는다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중국이 동남아 해역에서  석유 시추권과 어부들의 어업활동으로
월남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영토분쟁과 반대 감정을 자아내고있다.

호치민 대통령을 기념하기위하여 만든 여러 시설과 부근 공원을 세시간 정도 걸처 끝내고 보니, 해는 찌는듯이 더웠다. 아마 화씨 100도쯤은 될것 같았고, 온몸이 투성이로 젖어 있었다.

뻐스는 우리를 하노이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여행사 전용 월남 식당으로 안내했다. 점심은 월남의 전통 음식이었는데 나는 월남국수 국물 맛이 다행히도 입에 맞았다. 월남사람들은 체구가 적은 편인데 가이드에
의하면 그것은 월남물에는 석회암이 섞여 몸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도 여행 출발전에 읽은 월남소개 책에 의하면 수도물은 마시지 말고 병에든 물이나 끓인 물을 먹으라고 되어 있어 언제나 물병을 갖고 다녔다.

점심후, 뻐스는 하노이를 떠나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one of the wonder" 지정한 Ha Long Bay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곳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3000개나 있다고 여행소개 책자에서 읽었다. 가이드는 계속해서 월남에 대하여 설명했다.

한국의 김우중씨가 아직도 개인적으로 국빈 대접을 받고 있으며, 대우호텔이 호화스러운 호텔로 하노이시에 남아 있다.

요사히 월남 사람들은 대부분 질서에 대하여 무심한 편이다.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에서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걸어오는 월남사람이 앞에줄 서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태연하게 들어가는것을 여러번 경험 했다우리 뻐스가 달리는 시골길 사거리에도 신호등이 거의 없었고 교통법규가 거의없는지 길위로 가는 차들이 질서없이 달린다.

서로 서서 가려고만 한다. 이것은 월남 도시나 시골이나 거의 마찬가지인것 같았다위험하기 비할데없다.

가이드는 계속해서 월남에서는 모토싸이클을 타고 다니면서 핸드폰을 도난 하는 사람이 많으니 조심하라던가, 길에서 물건파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혀 믿지말라는등 경고를 해준다.

뻐스가 달리는 시골길가에는 거의 상점마다 문에 철문이 설치되어 있어, 도둑이 많은것을 알수있었고, 빈허한 시골 거리인데도 미국 도시에 고급 Fashion상점에서나 볼수있는 비싼 유리로 점포 전면을 만들어 앞은 화려하게 만들려고 한것이  눈에 자주 띄었다.

뻐스는 부슬비를 맞으며 시골길을 계속 달렸다. 수십마리의 닭을 담은 닭장을 뒤에 싣고 가는 motorcycle, 혹은 7-8마리 돼지를 cage 싣고가는 motorcycle 뻐스 창밖으로 보았다.
그리고  비가 오는중인데도 여자가 우비를 쓰고, 조그만 motorcycle 앞과 뒤에 사람씩을 태우고  시골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는것도 보았다비가와서, 버스 차바퀴에서 튀는 흙물도 그대로 맞아가며 달리는것이 너무나  측은해 보였다.

우리 뻐스는  , 그리고 뒤에도 motorcycle 둘러 쌓인체 함께 달리고 있었다.
월남에서는  motorcycle 교통수단의 중심이라 하겠다.  Motorcycle 대부분 Honda 회사제품이였다.

월남여성은 정말로 위대한 점이 많았다. 월남 여성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조그만 체구인데도 힘든 농사일이나 무슨일에도 적극적이였다머리도 현명하다는 말을 들은것이 기억났다. 3개의 전쟁을 90 여년간 이상을치르다 보니 전장에 수많은 남성들이 생명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우리 버스가 달리는 시골길 가까이 주변에는, 좁지만 이삼층으로 , 그리고 모두 목조가 아니고 씨멘트 콘크리트로 건물을 짓는것이 특이했다뻐스가 달리는 시골길 부근에 있는 상점안에는 날씨가 무더워서 웃옷을 벌게 벗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고상점 앞에는 , 다섯사람이 쭝그리고 앉아서 얘기를 하는것이 옛날 한국 시골모습처럼 보였다.

아직도 한국의 30-40 년전 정도 상태라 하겠다. 물론 하노이 시내는 커다란 아파트 혹은 사무실 건물이 많이 있었지만. 내부 시설은 좋은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최근 월남국민들의 월평균 수입 150-250불이고, 많은 국민이 아직도 여러 가족식구가
한방에서 산다고 한다우리가 뻐스가 달리는 고속도로 부근에서는 여러가지 건설공사를 하는 츄럭들이 많이 보였다.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부지런한것 같았다. 우리가 뻐스가 지나가는 시골길 부근에 사는 사람은 그래도 중상급 이상 국민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한다더욱 떠러진 곳에 가면 정말로 빈민들이 많다고 한다. 월남국은 아직도 문맹율이 높은편이다. 초등학교 까지만 의무교육이란다. 월남은 지방에 따라서 여러 방언이 많고, 국가언어 문자도 오랫동안 중국한자였으나,  17세기 초에 와서 화란 선교사가 로만 알파벳을 이용하여 만든 문자가 현대의 월남의 공식문자가 되어 쓴다고 한다.

나는 더운 열대기후와 아마도 언어가 불편한것이 월남 국가 발전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 되었다. 많은 월남 노동을 하는 국민들은 아직도 한국에 가서 일하는것이 희망이며, 몇년 일하고 저축하고 돌아오면 이곳에서 자영사업 할수있는 자본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가이드가 계속 설명한다.

하노이를 떠난지 4시간이 지나 뻐스는 우리가 머물 Ha-Long Palace Hotel 도착했다. 17 건물인데 창문 커튼을 열고 보니 뜨거운 열대 기후날씨에도, 멀리 보이는 Ha-Long Bay 경치가 평화스럽고 아름다웠다. 샤워를 하고 잠시 침대에 누우니 피곤과 더위가 풀리는것 같았다.

5
시가 되어 일행 모두가 약속한데로 호텔 lobby 모였다. 기다리는 뻐스를 타고 저녁식사를 여행사 전용식당으로 갔다. 하루 세끼를 시간 마추어 찾아 먹으니, 편해서 좋기는 하나, 식성이 좋은 내가 싫것 먹으면 나중에 후회할이라, 절대로 과식을 않하도록 신경을 썼다.

식사후,  Ha Long Bay 시내를 관광하고 나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다음은 여행사
스케쥴에 따라서  관광 단체일행 모두가 발맛싸지를 받으러 맛싸지 -러에 가게되었다.
우리 여행단체는 남녀 각각으로 나누어 한방에 5-6 사람씩 나누어 한시간 동안 맛싸지를 받았다. 가이드가 팁으로 2,000원씩만 지불하라고 부탁했다. 나머지 경비는 여행사에서 치루는모양이다. 시간 노동 팁이 너무싼것 같아 나는 3,000원을 주었더니, 상당히 고마워 했다. 월남에서는 미국 달라와 한국 원화를 일반상점에서 환영한다. 그리고 한국돈은  1,000원짜리 10장보다 10,000원짜리 1장을 더욱 원하고 있었다.

한국 여행사가 모집해서 가는 단체 여행들은 종종 물건을 파는곳이나, 특별한 쇼를 하는곳으로  무조건 여행자들을 데리고 가면서 강제 참석을 강요하는것이 단점이었다.

호텔 방에 돌아오니 벌써 10시가 되었다바쁜 하루였다. 하루지낸일을 정리하고 나니 11 반이다.

Email from Edward C. M. Kang, C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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