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馬島 - 1/2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기 바라면서
볼거리 전해드립니다
今日も樂しい一日になることを願いながら見どころを傳えて上げます
대마도
대마도
하면 누구나 한번쯤 가 보고싶은 섬, 인구약 30,000명 면적은
709㎢이고,
한국여행객이 평일은 700-800명씩
들어가고 주말은 2,000명이 북적된다고 한다.
쓰시마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쓰시마시(市)에 속한다. 시 아래 6개읍(이즈하라[嚴原町], 미쯔시마[美津島町], 도요타마[豊玉町], 미네[峰町], 가미아가타[上縣町], 가미쯔시마[上對馬町])이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 [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특히 대마도에는 멧돼지가 많아 에도시대에
멧돼지 퇴치를 담당하는 번사(藩使)를 두기도 하였다. 산촌에서는 숯제조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 이었기 때문에 산림의 벌채가 심했으나
이후 조림이 이루어졌다. 바다장어·오징어·도미잡이와 전복·소라·성게·천연김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이즈하라 항은 대마도의 주요 어항으로 오래전부터 번성하였으며 식당, 술집 등 번화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어획고가 줄면서 상업적인 활기도
줄어들었다. 매년 8월에는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린다.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골군 일본 본토 정벌을 위해 대마도에 상륙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마도를 근거지로 조선의 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폐해가 막심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였고 굶주린 왜구들에게 쌀을 제공하는 회유책과
벼슬을 하사하는 귀화정책 등의 정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되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李從茂)가 200척의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대마도의 수비가 완강했고 복잡한 지형의 현지사정에 어두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마도의
지명은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이
그 예가 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쓰시마도주(島主)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였으며 그의 장인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이후 대마도 번주 소우지[宗氏]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 염포·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이 활발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이며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두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쓰시마의 중심지역인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소 요시토시를 기리는 반쇼인(萬松院)등이 남아 있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가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있으며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부근에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향토사료관이 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가 대마도 미네초(峰町)에 소재한 엔추지(圓通寺)라는 사찰에
세워졌다. 그리고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新羅國使朴堤上公殉國碑)가 있다.
그는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등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출처 : 두산백과)
히다카쯔항 국제여객터미널
比田勝港國際タ-ミナル
점심
昼食
조선국역관 순난지비
朝鮮國譯官殉難之碑
한국전망대에서 조망
韓國展望臺で眺望
날씨가 좋으면 부산항이 보이며, 밤엔 야경도 보인다고 합니다
天氣がよければ、釜山港が見られ, 夜は夜景も見られるとします
미우다 해수욕장
三字田浜
거문고 대은행
琴の大銀杏
樹齡 1200 ∼1500
樹高 23m, 幹周 12.5m.
1500年前 百濟로부터
전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라고 한다.
1500年前百濟から寄せられた日本最古の銀杏の木という.
에보시타께
烏帽子岳(60m)
신사(神社)가 있음을 상징하는 오이(烏椅)
神社があることを象徴する烏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郎) 1848. 1.27. ∼ 1934. 5. 30.
(
)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는 발트 함대를 보유한
해군 강국이었고 일본조차도 패배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으나
일본의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일본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 동해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정자전법으로
격파하여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정자전법(丁字戰法)
혹은 정자작전(丁字作戰)은 포함이 격돌하는 해전 전술 중 하나로 적의 함대의 진행 방향을
가르는 형태로 아군의 함대를 배치하여 이전
화력을 적의 함대의 선두함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적 함대를 각개 격파하는
전술을 말한다. T자전법(T字戰法, Crossing the T), T자작전(T字作戰)이라고도 한다.
萬関운하를 만들어 일본함대를 숨겨놓고 러시아 발트함대를 유인한것이 명장의 전술인 것이다.]
그 이유는 국가 대부분이 '大艦巨砲主義'
(
)
즉, '거대한 대포를
탑재한 몸집이 큰 전함으로 해상에 있는 표적을 일소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일만여 톤의 거대한 몸체 전함들과 전함보다는
작지만 속도가 빠른 순양함을 건조하던 시대였지만, 도고 헤이하치로는 달리 생각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여러 제국이 포탄 개량에서 포탄이 적 전함의
장갑 관통에 중점을 두었던 사정과 다르게 일본은 포탄의 폭발력과 화재를 일으키는 능력을
역점으로 하여 화약 '시모세'를 개발하였고 이 포탄은 두께는
작지만 화약을 속에 많이 넣었으므로 폭발력이 강하여 러시아 군함에 쓰던 부식 방지용 페인트는
'시모세' 한 대 맞고 쉽게 화염에 휩싸일 정도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더구나 해로를 너무 길게 잡아서 병력이 지치게
한 러시아 해군의 실수도 패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만제키 바시(만관교)
まんぜきばし(萬関橋)
만제키바시에서 내려다 본 운하
萬関橋から見下ろした運河
쓰시마시 이즈하라쵸우
반쇼가쿠에서 석식
大馬市 嚴原町 萬松閣で夕食
(2016. 7. 14.)
Email from K. H. Choi through Hak Joo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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